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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s of Memories
음악은 유용한 것이 아닙니다. 음악은 그냥 존재하는 거예요. by 달크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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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쓰는 글입니다. 이 바로 전 글이 9월달에 쓴 글이니 반년만이네요.
작년 초에 미투데이를 시작하면서 블로그에 소홀해지기 시작해서, 겨울즈음부터는 RSS리더를 비롯해서 거의 블로그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꾸준히 들러 주시거나 구독 중이실 분이 얼마나 계실런지 모르겠군요. ^_^;
JH님의 홈페이지에 들락거리다가 태터툴즈를 접하고 이 블로그를 시작한지도 조만간 4년이 됩니다. 별 다른 생각없이 시작했던 블로그였고, 4년동안 쌓인 글도 대부분은 그저 '잡담'에 불과할 글조각 뿐이지만. 그런 글들을 남기는 것이 즐거웠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주기까지 했으니 그것으로 또 되었지요.
쉬는 동안에도 이 블로그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적어놓았지만 결국 글로 공개하지는 못한채 유효기간이 넘겨버린 메모 조각들을 볼 때마다 어떻게든 이 공간을 정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물적/심적 여유가 좀 부족하기도 했고, 이래저래 지금까지 늦어지게 되었네요. 그러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주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블로그를 아예 다른 곳으로 옮기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결심을.
이야기는 좀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웹서핑을 다니면서 보아온 개인 홈페이지들을 부러워만 하다가 유료 웹호스팅을 결제하고 쓰기 시작한 것이 2001년 즈음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개인 홈페이지를 열 염두까지는 차마 내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알게 된 친구 몇 명들과 같이 쓰는 공간으로 사용했지요. 그런 계정 속에 개인적인 공간을 따로 마련하자니, 지금처럼 URI 주소가 너무 길어지고 지저분해지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도메인도 곧 구입했지만, 기존 주소를 다 바꾸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냥 연결만 시켜주는 포워딩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요. 처음에는 별 아쉬움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아쉬움이 생겨났습니다. 각기 다른 여러 블로그들을 방문하면서도, '나도 내 도메인으로 연결되는 깔끔한 주소의 홈페이지/블로그를 갖고 싶다'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로부터 몇년의 시간이 흘러서 블로그도 오픈했고, 50MB였던 공간이 3GB의 공간으로 늘어났지만, 아직도 그 바람을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주소'의 문제. 깨진 링크를 싫어하는 사람이 저 혼자 뿐만은 아닐겁니다. 링크로 이곳과 연결되는 곳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다른 곳으로 옮기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것은 반드시 이 주소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리고 비용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지금 있는 곳은 장기이용자할인이 있어서 일반 요금의 절반 가격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언제 옮기든 옮겨야 할 것이라면 지금 옮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실행은 의외로 간단하더라구요.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그리하여 블로그를 옮기고 새로운 공간, 새로운 블로그에서 새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블로그는 DB 백업을 통해 고스란히 새 계정의 보관용 아카이브 블로그로 이전하고, 새 블로그는 완전히 새로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새 블로그로 옮겨간다고 해서, 이곳이 당장 없어지진 않을 겁니다. 짧게는 반년에서 길게는 2년 정도 계정을 유지할 예정이니까요. 하지만 결국에는 접속이 되지 않을테니, 혹시나 이 블로그에 트랙백을 보내셨던 분이나 앞으로 보내실 분이 이 글을 보시면 이곳이 아닌 새로 이전한 블로그로 주소를 고쳐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들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는 새 블로그에서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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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원문은 EIDF 공식사이트의 '나도 EIDF 평론가' 게시판에 실었던 다큐멘터리 감상평입니다. 다큐멘터리를 막 다 보았을 때에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는데, 방송된 당일날 컴퓨터를 켜고 접속해 본 작품 페이지에서 의외로 마이클 무어를 옹호하면서 작품에 혹평을 하는 20자평들이 많이 보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시일이 지난 지금은 그 비율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곰곰히 생각하다가 반박을 하는 형태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20자평에 올리기에는 내용이 너무 길어져서 EIDF 평론가 게시판으로 옮겨적었습니다. 급하게 쓴 글이었는데, 운좋게도 심사를 통해 선물을 주는 이벤트에 당첨되었더군요.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21일 금요일, EIDF 사무국에서 보내온 선물이 도착했기에 기념삼아서 글을 다듬은 후 블로그에도 올려봅니다. 글을 쓴 계기가 좀 불순해서인지, 다 쓰고 난 후 글을 보니 좀 딱딱하게 되었다 싶지 않나 싶기도 한데, 견고한 글투는 잘쓰면 참 매력적인데 적어도 지금의 저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글투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것보다도 잘 쓰지를 못하니깐.
다큐멘터리적 진실과 윤리적인 방법(Ethical Method)를 따로 떼어 놓을 수 있을까? - 마이클 무어 뒤집어 보기
주말에 TV 앞에 앉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평소 TV를 즐겨보는 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번주 토요일 밤은 TV앞에 앉아서 TV와 함께 보냈다.
가족들과 과일을 먹기 위해 거실에 앉은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프로그램은 KBS의 '미디어 포커스'였다. '미디어 포커스'는 KBS의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으로, KBS를 비롯한 다른 신문,방송 매체의 보도 태도나 사실 왜곡, 저널리즘 속 윤리적인 문제를 주로 지적하고 비평하는 프로그램이다. 보통 서너꼭지로 나눠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지만 마침 어젯밤은 200회 특집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특집용 구성이었기에 그날의 주제는 단 하나. '미디어 비평, 저널리즘을 지킨다'였다. 이 날의 특집 프로그램의 내용은, 호주 공영방송 ABC를 대표하는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인 Media Watch를 중점적으로 취재하여 미디어 비평의 가치를 부각하고, Media Watch와 미디어 포커스와 비교하며 200회 동안 쌓인 프로그램의 노고와 성과를 점잖게 자축하는 내용이었다.
미디어 포커스를 다 보고 난 뒤, 채널을 EBS로 돌려 EIDF가 시작할 때부터 점찍어놓았던 '마이클 무어 뒤집어 보기'를 보았다. 작품의 전체적인 만듦새가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다큐멘터리계 스타의 전혀 다른 면모와,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그의 작품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었던 흥미로운 기회였다.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데비 멜릭과 릭 케인은 호주의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마이클 무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호의적인 출발과는 달리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조사를 하면 할 수록 주변에 엇갈리는 평가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이클 무어는 그들의 인터뷰 요청을 갖은 핑계를 대며 피하게 되고, 두 감독은 마이클 무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그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이클 무어가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켰던 전례가 있고, 그의 다큐멘터리들에 조작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개인적으로 마이클 무어의 특이한 성격을 다룬 부분보다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그의 작품들 중에서 조작적인 요소가 많다는 점이 더 놀라웠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마이클 무어가 '사실'을 가지고 '조작'을 하는 방식은, 앞서 보았던 '미디어 포커스'가 주로 다루는 주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 보고 난 뒤에 이 다큐멘터리가 논쟁거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오늘 EIDF 작품 페이지에 올라온 20자 평을 보니 이 작품에 대해 반감섞인 의견이 많아서 조금 놀랐다. 마이클 무어의 사실 조작과 왜곡을 지적하는 이 다큐도 역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나, 다큐의 내용은 인신공격이나 비난과 마찬가지라며 마이클 무어를 옹호하는 글들이었다. (그리고 20자 평에 내가 본 다큐멘터리와 다른 의견들에 대한 생각을 적다가,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 같아서 다 지우고 이곳에 글을 쓰게 되었다.)
<마이클 무어 뒤집어 보기>가 보여주는 방식이 무어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감독의 의도한 바인 듯 하다. 감성적인 편집과 나래이션 뿐만 아니라 무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무어를 인터뷰하기 위하여 고분분투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로저와 나>를 연상시킨다. 또한 마침내 '짧은' 인터뷰를 성사시키고 헤어지기 전에 마이클 무어와의 포옹을 전하는 감독의 시선과 목소리에서는 (그 인터뷰이-마이클 무어-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비꼼까지 담겨있다.
하지만 그 모든 보여주기 방식이 무어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마이클 무어가 그의 작품 속에서 항상 넘고 있는 선을, 데비 멜릭과 릭 케인은 넘어서지 않는다. 이 다큐멘터리 상에서 의도를 담고 '편집'되어 보여지는 인터뷰들과 화면들은 관객들을 겨냥한 노골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기 보다는, 주욱 나열한 다음 생각할 만한 거리를 던져주는 식이다. 다큐멘터리 속의 많은 인터뷰들은 무어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고 감독 역시 그쪽에 더 무게를 두고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를 좋아하며 지지한다는 목소리도 담겨져있다. (그리고 감독은 그들을 비꼬지 않았다.) 결국 마이클 무어의 품성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보는 사람의 몫으로 남게 된다.
이 다큐멘터리가 지나치게 왜곡되어있다는 것에 동의하기 힘든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다루는 내용이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에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정치적인 입장에서 마이클 무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입장에서 마이클 무어를 비판한다.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 작품의 두 감독은 앞서 말했듯 무어의 방식을 연상시키는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방법을 택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볼 수 있고, 허용되는 방식이다. '어떤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무어의 다큐멘터리가 담고 있는 '정치적인' 주장에 대한 동의여부와, 무어 개인에 대한 엇갈리는 '평판'을 떠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다큐멘터리의 윤리적 문제제기는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으며 생각해 볼 만한 것이라는 점이다.
<마이클 무어 뒤집어 보기(번역된 제목보다는 'Manufacturing Dissent: Michael Moore and the Media'라는 원제가 더 작품의 주제를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마이클 무어에 대한 주변의 상반된 평가, 그 동안의 모순적인 행보, 주장을 위해 다큐멘터리에 조작을 가하는 모습 등을 보여주면서 우리 자신이 다큐멘터리라는 미디어를 대하는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보통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것은 곧 사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작되지 않은 사실만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깨어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어떠한 조작도 가능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반드시 진실을 담아야 한다는 점이다'라고 말하는 다큐멘터리 속 마이클 무어를 보며, 이번 EIDF 2007의 마스터클래스에서 애니 골드슨이 언급했던 '다큐멘터리적 진실'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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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ufacturing Dissent: Michael Moore and the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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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소통에의 욕구가 있기 때문에 각종 채널을 만들어서 서로에게 닿으려고 했기도 했겠지만, 이제
다양화된 채널이 소통의 필요성이나 욕구를 증대시킨다. 그만큼 의사소통의 실패에 의한 좌절감도 늘어간다. 국제 전화가 비싸다는 생각이나 인터넷으로
TV를 볼 수 없다고 믿던 시절에는 전화를 매일 걸면 연결되지 않는 시점도 있다는 것이나 TV 스트리밍이 제대로 안 될 때 치솟는 스트레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길이 있으니까 다니지, 없으면 돌아가거나 가지 않는 게 보통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길에 다시 담을 쌓아 못 다니게
하면? 선량한 사람이라도 좌절하고 화를 내게 된다.
휴대 전화가 없었을 때는 울리지 않는 전화가 사회적 인간관계의 실패를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없는 것을 가지고 생각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은 울리지 않는 전화가 외롭다. 1년에 한 번만 만날 수 있는 견우와 직녀를 더 괴롭게 하려면
터지지 않는 휴대폰을 주고 '지금은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합니다"라는 얄미운 여자 목소리만 계속 듣게 하면 된다. 블로그가 없을 때는
쓰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생긴 후로는 쓰게 된다. 사람들이 내 글에 반응할 수 있는 채널이 없었을 때는 반응이 없다고 구구하게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채널이 있는데도 소통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집에 돌아갈 때 하늘의 샛별을
보고 쓸쓸하다고 생각한다. 이상한 일이다. 이제는 지구반대쪽에 있어도 배타고 한 달 반 가야 만날 수 있고, 편지 보내면 한 달 넘어 답장받는
시절도 아닌데도 외로움이 줄지 않았다니.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휴대폰이 있고,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켜면 메신저가 있고, 집에 가면 전화가
있는데도. 채널이 많아지면 그 채널을 통해 이어지는 관계만큼 닿을 수 없는 관계도 실감하게 되고, 좀 더 가까워진다고 해도 더욱 가까워지지
않음을 슬퍼하게 된다.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길이 있는데도 가서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닿지 않을까봐 길을
만들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계속 계속 닿을 수 있는 길을 만든다. 그렇다고 해도 외로움이 줄지 않음은 필연, 방법이
늘어난다고 해도 완전한 연결이 없듯이 계속 좌절하는 통화가 나오는 것이다. 좌절하는 블로그, 좌절하는 편지. 좌절하는 문자. 통하기 위해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갔다가 돌아나오면서 좌절하는 게 사람. 그래도 또 언젠가 같은 길이든 다른 길이든 돌아가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만드는 의사소통의 채널은 네모반듯하게 구획된 신도시의 거리가 아니라, 아리아드네의 실로도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와 같은 건지도. 그러니 길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나갈 수 있는 길만큼 잃어버리는 길도 많은 게 아닌가.
- milkwood '채널의 확대와 좌절된 통화' (마지막부분 발췌)
'나갈 수 있는 길이 많아진 만큼 잃어버리는 길도 많다'는 것을 직시하는 것, 그것 자체가 이 다스리기 힘든 외로움을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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